시를 읽는 재미
#시를읽는재미(비렴)
시를 읽는 재미(4) / 신경림
시 읽는 재미 셋, "시가 던지는 암시와 비유의 메시지를 읽을 때"
그러나 시가 그런 것만 가지고 있다고 되겠습니까. 워즈워스로 다시 돌아가서 얘기하자면, 워즈워스는 시인이 보통사람과 다른 것은 자기가 생각하는 것, 느끼는 것, 말하고자 하는 것을 분명하고 힘있고 단순화시켜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을 했지만 덧붙여서 시를 읽는 사람들도 조금씩은 보통사람과 다른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감수성, 직관력이 일반사람보다 뛰어나다는 점만은 분명하다는 말입니다. 직관력 감수성 이런 것은 시를 좋아하는 사람이면 이미 다 가지고 있다는 얘기지요.
여기에 제 생각을 덧붙이자면 시를 쓰는 사람들은 그 바탕위에서 일반인들이 가지고 있지 못한 직관력과 감수성을 가지고 있는 만큼 일반인들에게 일정한 책임을 가지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것은 일반인들이 느끼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것, 즉 어떤 위험을 일반인들이 깨닫지 못할 때 그것을 알려주는 책임이나 의무를 시인이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시인이 알려주는 경고나 예감을 읽는 재미가 또한 시를 읽는 재미로 빠뜨릴 수 없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시를 읽으면 도저히 자기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을 일깨워주는 경보나 예방을 시에서 발견하는 것도 시를 읽는 또 하나의 재미입니다.
이병철이라는 시인이 쓴 시가 있어요. 88년부터 해금되기는 했지만 6.25 전에 월북을 했던 시인입니다. 옛날에 이 시인의 시를 읽으면 반공법으로 잡혀갔었어요. 이병철 시인이 시를 많이 발표하지는 않았지만 북쪽에서는 조금 발표한 모양이에요. 그런데 그쪽에서 발표한 시를 제가 보니까 도저히 읽어주지 못할만한 시가 많아요. 거기서는 수령에 대한 충성이 없으면 시를 발표하지 못하니까. 하지만 여기서 발표한 시 중에는 뛰어난 시가 있습니다. 제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나막신'이라는 시입니다.
은하 푸른 물에 머리 좀 감아 빗고
달뜨걸랑 나는 가련다
목숨 수(壽)자 박힌 정한 그릇으로
체할라 버들잎 띄워 물 좀 먹고
달뜨걸랑 나는 가련다
삽살개 앞세우곤 좀 쓸쓸하다만
고운 밤에 딸그락딸그락
달뜨걸랑 나는 가련다
1944년, 1943년 쯤에 썼던 시라고 합니다. 그 무렵이 얼마나 어려운 시절이었습니까. 이 시를 썼을 때 사람들은 지금 때가 어느 때인데 한가한 소리를 하느냐는 얘기를 하고 핀잔을 줬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시 속에는 일제의 박해 속에서도 여유를 갖고 우리의 몸과 정신을 온전하게 보전해야 한다는 메시지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환경속에서 우리가 살려면 우리가 가지고 있던 온전한 것을 버려서는 안된다는 메시지를 이 시는 던지고 있는 거예요.
이 시를 제가 처음 읽은 것은 6.25 얼마 뒤에요. 미군부대 따라다니는 하우스보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때 포성이 들리는 상황에서 먹고사는 가장 속편한 자리는 미군부대를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집에 있으면 굶지만 미군부대 들어가면 배불리 먹고 동생들도 먹고 그랬으니까 모든 중학생들의 꿈이 미군부대에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저도 1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들어갔습니다.
제가 6.25때 미군부대를 처음 들어간 것은 충청북도 영동이란 곳이었는데 그 부대가 원주에서 홍천으로 이동했어요. 그 부대가 중공군하고 싸움이 붙었을때 저를 관장하고 있는 미군 대위가 나한테 '너 미군하고 함께 다니는 것을 보면 너도 언제 죽을지 모르니까 도망가라'며 원주까지 차를 태우고 와서 원주서 나를 놔줘서 충주까지 갔던 기억이 납니다.
이 시를 원주에서 미군부대 근처 헌 서점에서 사가지고 부대에서 읽었어요. 제가 이 시를 읽고 너무 감개가 무량해 하니까 대위가 무슨 뜻이냐고 물었습니다만 제가 영어가 안돼서 대위가 말없이 고개만 끄덕거리던 기억이 납니다.
그 시를 읽으면서 저는 굉장히 위안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이런 나쁜 환경 아래에서도 조금도 주눅들지 말자는 뜻이 아니냐, 아무리 바빠도 천천히 돌아가고 여유를 갖고, 낭만도 가지고 살자는 얘기로 들렸습니다. 아마 제가 전쟁통에 시를 읽는 여유가 있었던 것은 그 시를 읽은 감동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것 같아요.
여하간 시를 읽는 재미중의 또 하나는 지금 우리가 어떠한 곤경에 처해있는가, 또한 이 어려움을 극복하는데 무엇이 필요한가 하는 직접적인 메시지가 아니더라도 어떤 암시나 비유를 읽을 수 있는 것이 시를 읽는 재미중의 하나입니다.
역시 월북한 시인의 시를 하나만 더 읽겠습니다. 이용악이라는 시인의 '북쪽'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북쪽은 고향
그 북쪽은 여인이 팔려간 나라
머언 산맥에 바람이 얼어붙을 때
다시 풀릴 때
시름 많은 북쪽 하늘에
마음은 눈감을 줄 모른다
이 시를 발표한 것은 1930년대입니다. 감회가 지금하고는 달랐겠죠. 그러나 상상하건대 그때 이 시를 읽는 독자들, 특히 북쪽에 고향을 둔 독자들은 이 시를 읽으면서 아마도 가슴이 뭉클했을 것입니다. '아 정말 우리가 너무 가난하게 사는구나,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는 것 아닌가, 더 북쪽의 나라 중국이나 러시아에 우리의 귀여운 딸을 팔아먹으면서 살아야 하는가' 하는 여러가지 생각을 하도록 하는 시죠. 지금같은 환경하에서는 우리가 살 수 없으니까 개선해야 한다는 암시가 담겨있습니다.
물론 이 시속에 우리의 역사는 어떻고 오랑캐는 어떻고 하는 직접적인 말은 없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가 사는 환경이 우리에게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역사가 올바르게 나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일깨움을 읽는다면 그것도 시를 읽는 재미 중의 하나가 아니겠는가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시 읽는 재미 넷, "치열하고 처절한 '사랑의 시'"
처음에 제가 시에 접근하던 때에는 나하고 가장 감정이 통하는 시를 좋아했습니다. 그러한 시는 사춘기 때니까 '막연한 그리움', '이성에 대한 동경' 같은 것이었죠. 저는 지금도 가장 아름다운 시는 연애시라고 생각합니다. 연애시를 읽는 재미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요즘 어떤 베스트셀러라고 하는 시를 보니까 거지 얘기를 하는 것 같았습니다. 물질적 거지가 아니라 정신적 거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시는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진짜로 '정신과 정신의 작용' 같은 정서를 가진 연애시를 읽는 것도 시를 읽는 재미 중에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요소중의 하나겠죠.
저는 연애시를 가장 잘 쓰는 시인이 유치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양반은 살아서 연애깨나 한 모양이에요. 연애시가 참 많고 절실합니다. 재밌게 읽힐 수 있어요. 연애시를 읽는 재미는 제가 어떠한 말을 해도 시를 읽는 재미에서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 분의 '그리움'이라는 시를 읽어보겠습니다.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뭍같이 까딱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아주 쉬운 것 같으면서도 그리 쉽지 않은, 그래도 쓰기는 굉장히 쉬운 것 같죠. 시를 읽는 사람들이 이건 나도 쓸 수 있는데 빼앗겼구나 할 수도 있겠습니다.
사실 시라는 것이 그런 거예요. 읽는 사람들이 읽고 났을 때 '야 이건 내가 써야 하는데 이 사람이 먼저 썼네' 하는 생각이 있을 때 그 시가 정말 좋은 시죠. '나로서는 도저히 생각도 못하겠다' 라는 생각이 들면 재미난 시가 못되죠. 유치환씨는 바로 그렇죠. 파도가 치는 것을 보면서 짝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해보고 파도에 까딱않는 육지를 보면서 마치 내마음 같아서 그런 간단한 시를 쓴 건데, 누구나 쓸 수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 사람의 시 중에서 '그리움'이라는 시가 다른 한편 있습니다.
오늘은 바람이 불고
나의 마음은 울고 있다.
일찍이 너와 거닐고 바라보던 그 하늘 아래 거리언마는
아무리 찾으려도 없는 얼굴이여.
바람 센 오늘은 더욱 너 그리워
진종일 헛되이 나의 마음은
공중의 깃발처럼 울고만 있나니
오오, 너는 어디메 꽃같이 숨었느뇨
요즘 이런 연애하는 사람은 없다고 합니다만, 이런 시를 보면 치열하고 처절한 사랑의 시를 읽는 재미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경계할 것은 가짜 사랑의 시입니다. 잘 뜯어 읽어보면 사랑을 억지로 만들어서 관념적이고 툭하면 '님이여' 하고 그럽니다. 유행가하고 시가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유행가는 남들이 하는 소리를 똑같이 하는 것이고 시는 남들이 할 수 없는 것이죠. 또 한가지는 유행가는 이미지가 식상하고 독창적인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시에서는 이미지가 독창적입니다. 자기만이 가질 수 있는 얘기라서 다른 것입니다.
가짜 사랑의 시라는 것은 이미지가 독창적이지 못합니다. 그래서 시하고 대중가요의 중간쯤 속하는 사랑의 시는 읽어서 그다지 도움이 안되고 재미가 없습니다. 그런데에 재미를 들이기 시작하면 진짜 연애시를 읽는 재미를 못붙일 겁니다. 제가 중학교 3학년때 쯤 읽고 감동을 받은 연애시가 있습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데요, 김영랑의 '언덕에 바로누워'라는 시입니다.
언덕에 바로 누워
아슬한 푸른 하늘 뜻없이 바래다가
나는 잊었습네 눈물 도는 그 노래를
그 하늘 아슬하여 너무도 아슬하여
이 몸이 서러운 줄 미리사 알았거니
마음의 가는 웃음 한때라도 없더라냐
아슬한 하늘 아래 귀여운 맘 질기운 맘
내 눈은 감기었네 감기었네
이런 시는 대중가요가 못가진, 김영랑 시인만이 가질 수 있는 사랑에 대한 이미지 같은 것이 있죠. 그런 것을 찾아내는 즐거움도 시를 읽는 재미중의 하나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래요. 시도 대중가요 같은 것이 아니냐. '아 으악새 슬피우니 가을인가요' 이게 시가 아니냐고 묻는 사람이 있는데, 시와 대중가요를 구별을 못한다면 진짜 연애시를 읽는 재미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독특한 재미가 있는 거죠. 다른 사람이 못해본 사랑을 표현한 시를 읽는 재미도 있죠.
서정주의 '동천'이라는 시도 사실은 연애시입니다.
옮긴 글ㅡ